음악학원은 진정한 관계 형성을 위한 최적의 장소

 

모차르트와 하이든 시대의 피아노는
‘말을 대신하는 도구’였고,
베토벤 시대의 피아노는
‘노래를 대신한 악기’였다.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곳은 불완전한 공동체

“어머머머. 우리 학교 아이가 그런 일을 당했구나.”
얼마 전, 우리 아파트에 사는 한 주민이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혀를 찼다. 그 학교에 자녀를 둔 아주머니는 슬픔에 젖어 심란해했다. 이렇게 비극적인 상황을 선택할 수 밖에 없던 학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인간은 한 가지 공동체(共同體)속에서만 살 수 없다. 농경사회나 1차 산업 시대에도 한 사람이 속할 수 있는 공동체가 제법 존재했다. 부모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공동체, 조부를 중심으로 한 친인척, 동네 또래 아이들, 학교 선후배 등 어디를 가든 외톨이로 지낼 가능성은 드물었다. 현대 사회에도 아이들의 공동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핵가족이 있고 학교가 있으며 국어학원, 수학학원, 영어학원, 무용학원, 태권도학원 등 종류로 따지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과연 공동체라고 볼 수 있을까? 공동체란 관계 형성을 이룰 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몸만 섞여 있다고 공동체가 되지 않는다. 일전에 비유한바, 집단 미팅에 참여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총각은 공동체 속에 끼어들지 못하는 그저 외톨이일 뿐이다. 왈츠에서 짝을 만나지 못한 여인은 비를 맞아 떨고 있는 새나 길바닥에 붙은 낙엽처럼 외진 존재로 보인다. 공동체와 유리된 부평초다.
가족도 말이 공동체지 비유기적 비공동체가 얼마나 많은가. 엄마와의 사이는 좋지만 아무도 아버지를 상대해주지 않으면 이때 아버지의 존재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가족 왕따’의 희생물에 불과하다. 성인은 그렇다 쳐도 어린이가 공동체에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얼마나 위험한 일일까.

원생들을 서로 이어주는 학원이 진정한 학원

아이들은 진정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관계 형성이 이루어진 가운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소통이 가능한 공동체가 곁에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나눌 수 있는 교류의 현장이 어디엔가는 존재해야 한다.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는 이런 소통이 차단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국어, 수학, 영어학원에서는 그런 관계 형성은 언감생심이다. 단 한 가지 추천할 만한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음악학원을 소개하고 싶다. 물론 음악학원도 음악학원 나름이다. 고전적인 지도 방법으로 매일 피아노 연습 횟수만을 체크하고 ‘연습, 연습’을 뻐꾸기처럼 반복하는 그런 학원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적은 자든 큰 자든 서로의 관계를 이어주는 학원, 국어와 영어의 용맹정진 속에서 파김치가 되어 들어온 아이들에게 몸도 마음도 쉬면서 친구끼리 진정한 대화와 소통이 이뤄지는 그런 학원을 소개해주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어린이들의 마음을 열어주려고 해도 아이들이 처음부터 대뜸 악수를 청하지는 않는다. ‘칼란도’… ‘리타르탄도’와 ‘디미누엔도’로 접근하며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문자적인 시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아이들이 시인 같은 시를 쓰겠는가. 여기서 의미하는 시란 미술이든 언어든 음악이든 자신을 표현하는 창구를 내주어 서로 소통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헨리 워드 비치는 말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표현할 때까지는 명료하지 않다. 생각한 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거나 행위로 나타내지 않으면 그것 중 반쯤은 마비된 상태다. 우리 감정은 구름과 같아서 비로 내려질 때까지는 꽃피우거나 열매 맺게 할 수 없기에 표현해야만 한다. 내부에 있는 모든 느낌이 표현됨으로 발전된다. 생각은 씨요, 말을 꽃이며 행위는 열매다.’
경쟁도 질투도 싸움도 없이 그저 ‘내 마음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 아무리 생각해도 음악학원 만한 곳은 없다.

마음을 소통하게 해주는 음악학원의 ‘메디치 효과’

요즘 음악학원의 트렌드도 많이 변하고 있다. 오랜만에 ‘호모 루덴스’라는 책을 꺼내들었다. 호모 루덴스란 ‘놀이하는 인간’을 의미하지 않은가. 인간은 동물과 달리 놀이를 즐기며 그 놀이를 통해 인간으로 성숙해간다는 의미다. 여기서 말하는 놀이는 혼자 하는 컴퓨터게임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몸을 부대끼며 즐기는 놀이를 말한다. 이 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배우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깨우치며 상대방을 알고 배려를 배우는 인간만의 특성이다.
이런 점에서 음악학원은 표현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로 볼 수 있다. 고도의 정신적인 노력과 회전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음악과, 메디치 효과를 얻을 수 미술, 게다가 무언가를 읽기만 해도 신의 계시를 체험한다는 ‘코란’의 말이 그럴진데, 합창으로 언어를 유희하는 일은 몇겁의 천상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것 아닌가.
공동체 속에서 동요를 부르고 놀이를 즐기며 노래하고 연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원효의 ‘화쟁사상’(和爭思想)과 같은 위대한 철학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크게 보면 세상에는 서로 싸울 일이 없고, 이웃이 땅을 사도 배 아파하지 않으며, 함께 기뻐하고 박수칠 수 있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해탈의 마음세를 체득하게 된다.
문헌에 의하면 모차르트와 하이든 시대의 피아노는 ‘말을 대신하는 도구’였고, 베토벤 시대의 피아노는 ‘노래를 대신한 악기’였단다. 표현의 도구인 셈이다.
음악학원에 들어오는 모든 어린이는 시인이고 그 시를 표현하도록 정각(亭閣)만 만들어준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마음의 문방사우(文房四友)를 펼치고 세상에서 못다 한 이야기와 스트레스를 풀게 분명하다.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다면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그 장을 마련해주는 것은 음악학원 원장들이다. 따지고 보면 그대도 시인들이어야 한다. 엄마, 아빠에게 이 사실을 표현해야 하므로…

WRITE 발행인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