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하면 인간의 본성도 드러나

1918년 스페인 독감 2000만명 사망, 1957년 아시아 독감 200만명 사망, 1968년 홍콩독감 100만명 사망, 1977년 러시아독감 100만명 사망… 그리고 21세기가 들어섰습니다. 2003년 사스 774명 사망, 2009년 신종플루 19633명 사망, 2012년 메르스 521명 사망….
유행성 인플루엔자라는 용어가 생긴 1601년 이래 감기바이러스는 숱한 인명을 앗아갔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또 하나의 재앙이 놓여 있습니다. 2020년 2월 26일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가 세계적으로 총 79,773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엄청난 재앙이지요. 하지만 바이러스로 인한 재앙보다 무서운 재앙이 또 있습니다.
전염병은 인간 정신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최고의 시험장입니다. 내 근처, 내 가족, 내 도시로 전염병이 더욱 가까이 다가올수록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인간이 공포본능과 이기주의가 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게 확산됩니다. 벌써부터 식료품 사재기가 극성이고 마스크는 품절입니다. 음악학원들 역시 올스톱입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자들의 도시’는 지금 우리의 마음을 훑고 있는 이기심과 배타적 행동, 비방, 욕설 등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인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눈먼 자들이 속출하자 정부는 급히 격리 조치합니다. 그 갇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인간군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함으로 가득합니다. 성폭행과 폭력, 살인…
지난 2013년 개봉했던 영화 ‘감기’는 마치 오늘의 일들을 예견한 것처럼 현실감이 넘칩니다. 바이러스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나 혼자 살기 위해, 공동체 의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연약하고 힘없는 인간은 그 존엄성이 젖은 잎사귀가 뭉개지듯 철저히 짓눌리고 맙니다.
비난보다 현장에서 뛰는 모두에게 격려를

평소에 매일 싸우다가도 위험한 적을 만나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새로운 적을 막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평범한 기본 정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보다 더 큰 권력의 욕심 때문에 거대한 적 앞에서도 사분오열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흠집내기와 비방하기에 온 신경을 곤두섭니다.
심리학자 세리프는 공동의 적이 나타났을 때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실험했습니다. 이를 로버스 동굴공원 실험이라고 합니다. 12살짜리 어린이 24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로버스 동굴공원 안에서 운동시합을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웃고 떠들면서 시작했지만 경쟁심리가 발동하면서 점점 격해지더니 급기야 폭력사태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때 미리 숨겨두었던 더 폭력적인 그룹을 등장시키자 계속 싸우던 24명의 어린이들이 일제히 단합하게 됩니다.
이게 인간의 기본 정서입니다. 인도에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같은 군사서가 있습니다, 그 안에 중국의 ‘합종연횡’(合從連橫)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왕이여, 이웃 영토의 왕은 적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왕은 친구가 됩니다.’ 가운데 있는 왕은 양쪽 국가로서는 공동의 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사가 이럴진대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정치권은 이런 기본적인 인간 심리마저 거스르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온 국민의 삶의 방식이 정상과 너무도 유리하게 표류하는데 정치권은 콩 볶듯 연일 남 탓만 다갈다갈 까부르고 있습니다.
중국인 입국을 금지했어야 한다. 대구·경북을 봉쇄했어야 한다. 대통령을 하야시켜야 한다. 코로나19를 코로나20으로 바꿔야 한다. 대구폐렴으로 명명하지 말아 달라. 중국인들을 청와대에 방문하게 해달라 등등 숱한 딴지 걸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문재인 폐렴’이라는 극혐문구를 가슴팍에 달고 다니는, 제 입부터 피로 물드는 함혈분인(含血噴人)의 바보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권력깨나 잡는다면 상상해봅시다. 제 마음에 안 드는 사람마다 이마에 욕설을 달고 다닐 머저리가 될 게 뻔합니다.

인식한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류 공통의 적입니다. 모두가 뜻을 모아야 합니다. 새파랗게 젊은 니체가 32살 연배의 늙은 다비드 스튜라우스를 싸가지 없게 비방해서 유명해지던 시대가 아닙니다. 방역을 위해 현장에서 발벗고 뛰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실수가 있습니다. 중국입국을 막지 못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고, 대구를 봉쇄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방구석에 앉아서 훈수를 둘 게 아닙니다. 냉철하게 비판할 능력도 없고, 현실에 뛰어들지도 못하는 사람들… 사무실에서 몸을 도사리고 앉아 구호나 외치는 못난 정치인이나, 스마트폰으로 전염병의 참상을 불구경하듯 하다가 분노의 엄지를 가눌 줄 몰라 하루종일 거북이처럼 비난문자를 그리는 예비 치매자들의 행태는 바이러스라는 적을 앞두고 사분오열에 부채질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우리끼리의 싸움은 그쳐야 합니다. 싸우다가 이성을 찾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이어질까요?
즐겨읽는 책 중 위기 때마다 꺼내보는 책이 있습니다.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입니다. 인간의 지식… 현대로 비교하자면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의학과 과학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인식한계점’이라고 합니다. 문제가 갑자기 복잡하고 방대해지면서 인간의 어떤 지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지점, 그게 인식한계점입니다. 이럴 때 인간의 본성대로 울부짖고 혼자 살겠다고 상대방을 죽창 찌르듯 하다가는 모두가 몰살당하는 역사로 막을 내립니다. 마야가 그랬고, 아즈텍 문명이 그랬으며 로마 문명 또한 그 결과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결국 승리할 것

위기에 처하면 기망(欺妄)과 기만도 판을 칩니다. 신천지 자체의 문제보다는 ‘신천지의 거짓말’ 때문에 코로나19 문제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식의 한계점의 문제입니다. 합리적인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종교라 해도 바이러스라는 공동의 적이 발생했다면 감염 방지에 적극 협조했어야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것은 거짓과 모면, 도망이었습니다. 이는 안방에 앉아서 정부와 중국인들, 대구 신천지 사람들을 비난이나 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과 별 다를 게 없습니다.
자, 그러나 말입니다. 주제 사마라구의 ‘눈 먼자들의 도시’나 영화 ‘감기’ 모두 이성적이고 지극한 선한 인물들이 결국은 승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국민도 결국 승리하겠죠. 그러니 너무 걱정은 안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이기와 비난과 욕심이 판을 쳐도 우리 주위에는 반드시 선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주인공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가르칠 아이가 오지 않아도, 보고 싶은 선생님들을 볼 수 없어도, 영화관에서 음악이 흐르는 한편의 영화를 볼 수 없어도, 우리처럼 선한 사람이 있는 한 다시 일상을 회복할 것입니다.
이 불행한 사건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이 참에 안 되는 일을 원망하기 보다 ‘사람 만나는 일’이 카톡으로 소통하는 것보다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 시간으로 활용하면 어떨런지요. 아! 군중이 그립고 사람이 그립다. 이 황량한 봄이라서 더욱 그립다. 그런 게 읊조리면서요.

글 발행인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