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 올랐습니다. 타워 옆에는 컬러 산호처럼 징그럽게 다닥다닥 붙어있어, 타워보다 더 무거워 보이는 쇠붙이들이 남산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사랑 하나만 해도 천하보다 무거울진대 수만 개의 쇠붙이에 들어 있는 ‘사랑의 총합’은 얼마나 무거울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와~ 열쇠꾸러미들이네. 별별 사연이 다 있다. 저것 좀 봐, 가족들인가 봐. ‘영원히 행복하자’는 엽서도 있잖아?”
평소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타인의 잡담이 들리지 않습니다. 요즘 시국 탓인지 한적한 나머지 전망대 저만치에서 나누는 귀엣말 대화도 쌉쏘름한 공기를 뚫고 또렷하게 들립니다. 듣고보니 어떤 사람들은 그 쇠붙이를 보고 ‘열쇠 꾸러미’라고 합니다. 아마도 무심결에 ‘열쇠’라고 했겠지만, 창고 안에 있는 빵을 가져오듯 언제든지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사랑을 우리들 것으로, 내것으로 만드는 ‘욕심’이 불현듯 내뱉은 ‘열쇠’라는 단어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요?
남산꼭대기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그 쇠붙이들은 사실 ‘자물쇠 꾸러미’입니다. 열쇠를 꽂아 상대방의 사랑을 내것으로 만들어달라는 소원탑이 아니라, 이미 사랑을 맹세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수고롭게 맺은 사랑을 ‘영원한 창고’에 탁 집어넣고 자물쇠로 채워버리자는 약속입니다.
자물쇠꾸러미가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벽 중간중간에는 별도의 박스가 비치돼 있습니다. 연인들은 자물쇠를 낑낑거리며 채운 후 그 열쇠를 철제함 박스에 던집니다. 자물쇠에 넣은 그 사랑을 아무도 해체할 수 없도록 아예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물쇠꾸러미에 담긴 사랑의 총합은 남산타워보다 높고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그 자물쇠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가 있는 한 좌절 금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남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남산 위에서 이경(밤 9시부터 11시)을 향해 깊어가는 서울의 밤을 지켜보았습니다. 두어 시간 전에 걸어온 매봉산과 응봉산이 보입니다. 캄캄합니다. 왕십리에서 걸어오는 동안 처음에는 남산이 보였지만 중간중간에 매봉산과 응봉산에 가려 남산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산들이 어깨를 열고 남산을 잠시 보여주다가도, 다시 허리를 틀면 남산은 시야에서 또 사라집니다.
그래도 남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컴컴한 도시에 반딧불 물결의 바닷길, 저 너머 우리가 출발했던 응봉산 둘레길의 가로등과 팔각정 불빛이 부표처럼 점멸합니다.
‘그렇구나. 인생은 목표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중간 중간에 그 목표가 보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해도 결코 좌절하면 안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목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안개와 수풀더미, 작은 고개와 같은 장애와 고난들이 가로막혀, 남산이 잠시 보이지 않는다며 투정 부리다 약수동쯤에서 뒤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남산의 야간 절경을 볼 수 없었겠죠. 보이지 않는다고 남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견골상상(見骨想象) 이야기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꿈’이란 미래의 모습을 꾸어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마크 엘빈이 일생 코끼리의 흔적을 추적해서 발간한 ‘코끼리의 후퇴’에 따르면 4000년 전 중국에는 코끼리들의 굉장히 많은 그야말로 코끼리들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농경지를 점차 무차별적으로 개발하면서 코끼리가 살 수 있는 나무와 숲은 사라지고, 인간들은 그나마 삶의 터전을 잃은 코끼리들을 사냥해 상아채취와 고깃감, 또는 농경동물로 착취했습니다. 결국 그 많은 코끼리들의 씨가 말랐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코끼리들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코끼리를 단 한마라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코끼리의 뼈를 모아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상상하고 그 이미지를 그렸습니다. 그 모양이 바로 한자 ‘코끼리 상(象)’입니다. 이처럼 뼈를 보고 실재를 상상하는 것을 두고 ‘견골상상’(見骨想象)이라고 합니다. 뼈를 보고 실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죠.
코끼리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코끼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모양은 뼈로 된 ‘상’(象)이지만 그 뼈가 전부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코끼리의 실제가 바로 ‘꿈’이라면 뼈는 ‘믿음’과 ‘확신’입니다. 확신의 뼈를 보고 코끼리의 존재를 믿으면 그 뼈를 중심으로 코끼리 그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남산의 야경을 바라보는데 ‘코로나19’로 꿈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내면에서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를 칩니다. ‘아냐, 포기하기에는 너무 일러. 뼈가 보인다면 코끼리를 반드시 그릴 수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다고 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굴러가는 법

남산을 내려오다 흠집 하나 없는 하현달이 곁눈질합니다. 저 달은 차오르는 중일까 비워지는 중일까? 정답이 무엇이든 ‘채우면 비우고, 비우면 채워진다’는 영즉필휴(盈則必虧)의 범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아주 힘든 나날이 예상됩니다. 음악학원도 교습소도, 학교도 음악대학도 모두가 힘든 시기를 거쳐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교육기관이 문을 닫을 것입니다. 누구나 힘든 상황에서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변하지 않겠다며 열쇠를 버렸던 그 단단한 사랑의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골목길과 신호등과 수풀과 안개 때문에 비록 보이지 않아도 남산 산행을 포기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코끼리 형체를 반드시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확신’의 뼈를 놓지 않으면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들 때문에 굴러가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 때문에 굴러갑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몽땅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 힘냅시다.

글 발행인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