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천상 하피스트가
지상에 내려와 하프 ‘목공’이 되었다.
미니하프 ‘줄리’를 개발한 하피스트 써니 안을 만났다.

왜 그 아름다운 악기를 좀더 편하게 만들지 않을까

“원래 불편하면 뭐든 나오는 법이죠. 하프도 너무 크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죠. 언젠가 가볍고 운반이 편리한 악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끝내 안나와서 제가 직접 만들기로 했어요.”
45년 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한국유학생 1호로 하프를 전공하고 오랫동안 연주활동을 펼치던 하피스트가 어느날 미니하프를 직접 제작하는 길을 택했다. 하프 연주자가 직접 제작하는 일은 하프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본인은 연주자일 뿐 기술자가 아니기에, 누군가 그 무거운 하프를 가볍게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자 본인이 톱과 망치를 들었다. 1974년 미국 유학을 떠나 지난 2015년 한국에 돌아온 ‘써니 안(안영숙)’이 그 주인공이다.
써니 안은 세계 최고의 연주자 수잔 맥도날도를 사사하고 오케스트라 객원 및 솔리스트로 활동해왔다. 한마디로 세계적인 하피스트 반열에 오른 연주자다. 국내에 잠시 귀국해 서울시향에서 하피스트로 연주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요 활동무대는 미국이었다.
“하프를 평소 연주할 때에는 미니하프가 필요하다고 생각만 했지 절실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LA뮤직센터에서 일명 ‘가르치는 예술가’(티칭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개설해 하프를 그룹으로 가르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프를 클래스수업으로 가르치려면 수강생들이 각자 하프를 갖고 와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다고 그 비싼 하프를 뮤직센터에서 보유할 수도 없는 거고요. 그때 어떻게 하면 미니하프를 만들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프를 잠시 놓고 목공학교를 다니다

궁구(窮究)하게 생각하면 길이 보이는 법. 마침 예일대 물리학박사였던 남동생과 대화하던 중 ‘휴대할 수 있는 하프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내자 동생은 ‘만들면 되지 뭐…’ 마치 간단한 일인듯 응수했다. 시작은 정말 간단했다. 동생과 디자인을 마치고 목공전문가에게 제작을 의뢰하면 끝 아닌가. 그런데 어라! 디자인대로 나오지 않았다. 뒤틀리고 이어붙이는 등 쓸모가 없었다. 세 번을 거듭 실패한 써니 안은 팔을 걷어붙이고 목공을 배우기로 했다.
“목수는 우리가 준 디자인대로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플라스틱이면 모를까 나무로는 곡선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미국에는 대여섯 개의 하프 제작회사가 있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하프 장인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하프 디자인을 전혀 생각지 않는다. 대대로 내려오는 제작방식을 고수할 뿐 하프 소비자의 욕구에 맞는 신제품은 언감생심이다. 팔리지 않으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며 연주자가 불편하건 말건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물론 이미 작은 하프들이 있긴 하죠. 캘틱하프도 작은 편이고 몇몇 종류의 미니하프도 있지만 불편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는데, 사이즈가 어중간해서 무릎이 굉장히 아프거든요. 덜 아프게 하기 위해 무릎 위에 뭔가를 끼워 넣으면 하프가 줄줄 흘러내리는 등, 때로는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파워툴과 핸드툴을 오가며 5년 동안 공부

써니 안은 샌디에고에 있는 목공학교에 등록했다. 일반 연주자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는 그만큼 기존의 깎은 하프가 불편했다. 목공에 대한 기초지식 없이 몇 학기만 배우면 되겠지 했는데, 목공이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목공은 일생 동안 공부해야 할 전문지식이지 한두 학기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몇 학기가 지나고서야 알았다. ‘이케아’라는 가구회사에 물리학박사와 수학박사 출신이 왜 그렇게 많은지 처음 깨달은 순간이다.
깎고 다듬는 것만 배우는 게 아니라 대학교 교육처럼 커리큘럼이 많고, 기계들은 왜 그렇게 무서운지… 게다가 클래스의 동료들은 써니 안을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입학했냐는 질문에 ‘하프 만들려고 왔다’고 하자 같은 클래스의 학생들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으려 했다. 이들은 ‘우리는 직각이 아니면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상대해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클램프를 조이고 난리인데 뭘 좀 물어보려면 ‘기존 하프를 분해해서 그대로 카피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카피하려면 제가 왜 목공을 공부하겠어요.”
써니 안은 공부하는 동안 목공이 얼마나 위험한지 체험했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순식간에 손이 잘리고, 나무 자를 때 규격 이하의 나무를 밀어넣으면 거꾸로 튀어나와 나무파편이 가슴에 꽂힐 수도 있다.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나무를 자를 때에도 스텝(전동기계를 사용하는 일정한 절차, 1, 2, 3, 4와 같이 해야 하는 스텝)을 맞춰야 한다. 그런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동양의 작은 여인이 하프 만든다고 이리저리 다니며 질문을 하자 그들은 일절 상대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전기톱을 이용한 파워툴 과정만으로는 안되겠다 싶어 결국 손으로 직접 하프를 만드는 핸드툴 클래스를 추가로 공부했습니다. 이 과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몇 달 동안 조각칼만 가는 훈련을 시키질 않나, 열심히 갈면 칼날 각도가 잘못됐다고 다시 갈라는 등 아주 힘겹게 공부했죠.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였고요.”

미니하프 한국에서 만들 수 있다는 정보에 귀국했지만

목공의 늪은 점점 깊어져 갔다. 보다 못해 주변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그래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목공 제작은 쉽지 않았지만 머릿 속에서 이런 저런 아이디어는 매일 나왔고 나온 아이디어로 새로운 하프를 만들어 본다는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러면서 2011년 미국 특허도 받게 되었다. 이미 아이디어나 디자인만 가지고는 만들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여기까지 왔는데 왜 그만둬’ 하는 오기가 발동했다. LA에서 샌디에고에 있는 학교까지 무로 3시간 30분 동안 고속도로를 타고 다녀야 하는 거리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고행이었다.
“나중에는 회의감이 파도같이 밀려왔어요. 고속도로에서 아침 등교길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과 반대라서 선글라스를 끼고도 운전하기도 힘들었고 조금 늦으면 고속도로의 출근길과 겹쳐 지각한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잘 하지도 못하는데 지각하니까 더 속상했어요. 오죽했으면 기도까지 했겠어요. 목공에 대한 짝사랑이라면 그만 포기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답니다. 결국 선생님을 찾아 아무리 생각해도 목공을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마침 그분은 기타를 만드는 악기장인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참자는 말에 큰 위로를 받아 다시 힘을 얻곤 했죠.”
2012년 학교 대표 중 한명으로 Woodworking in America 전시회에 써니 안이 만든 하프를 출품할 기회가 주어졌다. 열심히 공부한 덕일까? 점차 교수들도 적극 도와주었고 날이 갈수록 학교생활이 즐거워지는 바람에(?), 몇 학기만 배울 요량으로 입학한 목공학교를 무려 5년 동안 다녔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재정상 같은 과목을 계속 등록할 수 없게 학교의 규정이 바뀌었고 졸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작업실에 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때마침 한국 정부의 창조경제 홍보이야기를 접했다. 한국에 ‘무한상상과학실’에 미국 장비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알아보기 위해 귀국했다.
2014년 정부가 홍보한 것 같이 일반인들이 제작을 할 수 있는지 과천의 ‘무한상상센터’를 찾았다. 3D프린터와 CNC(컴퓨터를 이용한 목재 절단 기계) 같은 목공 장비도 다 갖추고 있었다. 써니 안은 희망을 갖고 2015년 아예 영구 귀국을 했지만 막상 제작을 시작하려 하자 쉽지 않았다. 까다로운 절차와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하라는 등 일반인이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평생교육원, 하프교육과정 폐강이 오히려 기회가 되다

“무한상상센터의 기대를 접고 서울 인사동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지방에서 여러 제안들이 들어왔습니다. 교향악단 연주자로 활동해볼 것을 권유하는 분도 있었고요. 그러다 모 음대 학장의 찬조출연을 요청받았는데 그 연주회장에서 우연히 공주대 전 최석원 총장님을 만났답니다. 총장님은 평생교육원에서 하프과정을 개설해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하시더군요. LA뮤직센터에서처럼 클래스로 하프를 가르칠 기회가 생긴 거죠.”
세종필하모닉과 협연하는 등 연주는 계속했지만 하프 제작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평생교육원에서도 하프과정을 모집했지만 겨우 2명만 신청, 결국 폐강했다. 그게 끝인 줄 알았는데 이미 신청한 두 학생이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요청했다.
“운명은 알 수 없나 봐요. 원래 미니하프를 많이 제작해 한국에 보급하려고 했는데 다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 2명이 점차 늘어나 지금은 많은 제자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써니 안은 공주에 정착하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미니하프를 보급하려면 서울을 거점으로 해야 한다고 했지만 써니 안은 우선 공주를 고수했다. 그 덕분에 충남콘텐츠랩이 시제품 제작과 마케팅도 지원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학생들을 가르친 악기는 미국에서 직접 제작한 미니하프로 울림통이 없는, 그야말로 입문용이었다. 제대로 보급하려면 울림통이 확실한 하프를 만들어야 했기에 공주에서 다시 제작, 마침내 미니하프 ‘줄리’를 탄생한 것이다.

미니하프 줄리는 입문용이자 연주용

미니하프는 15개의 현으로 돼 있어 불과 투 옥타브 음역만 연주할 수 있다. 그러면 연주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지만 써니 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미니하프는 하프 입문용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큰 악기로 연주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큰 악기 연주를 잘한다고 해서 미니하프 연주도 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작은 악기로 시작하면 큰 악기도 잘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작은 악기를 먼저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어떤 분들은 두 옥타브로 연주가 가능하느냐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파가니니는 세 줄이 끊어졌어도 한줄만으로도 연주를 해냈잖아요. 두 옥타브면 그 안에서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습니다.”
써니 안은 무엇이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방법이 보이지 않지만, 할 수 있다고 하면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줄리하프는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옥타브를 얼마든지 극대화할 수 있다. 47현의 페달하프의 글리산도도 연주할 수 있고, 페달 대신 레버로 반음을 조절하는 레버하프의 기능도 소화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저는 학생들에게 두 가지 모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큰 악기로 연주하기 위한 입문용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큰 악기 못지 않은 연주법도 가르쳐줍니다.”
줄리하프는 최근 Jtbc 방송 ‘으라차차 와이키키2’에 등장한 적이 있다. 한 출연자가 하프를 들고 다니는데 그게 바로 줄리하프. 스탠드에 세우면 큰 악기처럼 보이지만 무릎에 올려 연주할 때는 앙증맞기 그지없다. 미니하프는 지금의 줄리하프보다 더 작게 만들 수 있지만 지금의 크기가 최적화된 사이즈로 볼 수 있다.
써니 안의 노력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줄리하프는 최근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그램에 널리 알려지면서 수강생들도 증가하고 있다. 써니 안은 공주 외에 서울 예술의전당 부근에 연습실 겸 교육장을 오픈하고 수강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특별하게 홍보하지 않고 SNS에만 홍보하고 있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오고 있어요.”
하프소리는 인간이 가장 듣기 좋은 음파를 내기 때문에 앞으로 미니하프를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어느 학부모는 자녀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봤지만 연습할 때 시끄러워서 굉장한 스트레스였다고 해요. 그러나 하프소리는 처음 배울 때에도 신경을 건드리지 않아 무척 좋다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맞습니다. 그게 바로 이 악기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고요. 초보자가 연주해도 아름답게 들립니다.”

한국인의 정서를 위해 미니하프 반드시 보급할 터

따지고 보면 건반악기는 하프가 누워있는 악기에 다름 아니다. 전위음악가가 피아노로 연주하다가 망치를 들고 모두 부순 후 하프로 만들어 손으로 뜯는 경우도 있다. 클라비코드 역시 현을 뜯는다는 점에서 하프와 다르지 않다.
“피아노는 해머로 현을 때린다는 점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을 보는 것이라면, 하프는 맨 얼굴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프를 연주하면 ‘음악을 만든다’는 생각이 더 강하고 정서적으로 훨씬 좋습니다.”
써니 안이 미국 연주생활을 은퇴하고 5년 동안 직접 목공을 배워 미니하프를 보급하는 진정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사실 그는 1974년 이후 잠시 귀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미국에서 살았다. 늘 고국이 그리웠고 고국에 정착하면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목공의 험난한 과정을 견뎌내고 끝내 미니하프를 만들었던 열정은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저는 다 같이 잘 살자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줄리하프를 배우고, 또 그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해요. 그래서 국민들의 마음이 정서적으로 따뜻했으면 좋겠고요. 그런 사명감을 갖고 미니하프를 제작하고 가르치고 있답니다.”

지도사 1급과 2급 과정 개설, 2급 지도사는 다수 배출

써니 안은 올초부터 공주대 캠퍼스와 세종시, 서울 등지에서 미니하프지도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12주 과정으로 2급 지도사 자격증반을 개설, 최근 2급 자격증 취득자들이 배출되고 있어 미니하프는 더욱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주로 음악학원 원장님들이 많아요. 이 자격증은 한국하프교육협회에서 수여하는데 12주 후 이론시험, 실기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중간에 지도실습도 이수해야 합니다. 2급은 줄리하프로 배우지만 1급부터는 레버나 페달하프로 배워요. 1급을 취득한 선생님은 본인이 2급 과정을 운영할 수 있답니다. 본인의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방과후 교사로도 얼마든 출강할 수 있습니다.”
써니 안은 줄리하프에 대한 큰 비전을 갖고 있다. 연주가 쉽고, 그 소리가 아름다우며 어디에서든 휴대하며 연주할 수 있는 작은 악기 줄리하프가 머지않아 오카리나와 우쿨렐레처럼 어린이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면 우리 국민들의 정서는 더욱 밝아지기 때문이다. 하프지도사 자격증에 대해 궁금하다면 010-3288-4277로 문의하거나 블로그 ‘미니하프 줄리’, 인스타그램 ‘him.harp’를 검색하면 된다.

글 김종섭